[ 송진우 --- 민족불멸론 ]
[동아광장정윤재] 신나게 단군을 이야기하자
2006-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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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에 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 ‘제왕운기’ ‘세종실록지리지’ 등의 문헌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단군사당 혹은 단군릉이 만들어졌는데 일제 강점기에 강제로 철거된 뒤 1936년 전국적인 모금운동에 의해 복원됐다. 그러나 일제는 동화정책을 밀어붙이며 각종 문헌이 전하는 단군 이야기들을 허황된 것으로 낙인찍고, 이에 대한 공적인 언급과 교육을 금지했다. 총독부와 관변 학자들은 조선민족이 본래 고대사가 허술한 민족이며 타율적이고 정체된 역사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열등한 민족이라고 묘사하면서 조선사 말살을 기도했다.
그러던 1932년 여름 어느 날. 당시 동아일보 송진우 사장은 현진건 기자를 불러 평양 출장을 명했다. 송 사장은 벌써부터 민족불멸론에 입각해 단군, 세종, 이순신을 함께 모시는 삼성사 설립을 추진했다. 그리고 그해 7월부터 전국적으로 시작된 단군성적(檀君聖蹟) 순례에 동아일보도 적극 참여하도록 했고, 그 일환으로 현 기자에게 평양 강동면의 단군유허지를 취재하도록 한 것이다. 1934년 1월에는 단군릉 수축(修築)을 위한 기금도 모았다. 동아일보의 이 같은 단군현양사업도 역사적 유래가 있는 것이었다.
조선 태종 때 변계량(卞季良)은 우리나라는 중국 천자의 분봉국(分封國)이 아니고 ‘단군이 하늘에서 내려와 개국하였기 때문에’ 임금이 환단((원,환)壇)에서 직접 하늘에 제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수천 년간 지속된 이 전통에 따라 세종도 원년에 환단에서 기우제를 올렸고 환인, 환웅, 단군을 모신 구월산 삼성사에 신하를 보내 제사지냈다. 세종 7년 9월 25일, 평양에 들른 정척(鄭陟)은 단군조선이 기자조선보다 시기상 앞서는데도 불구하고 오가는 중국 사신들이 참배하는 기자사당 안의 단군신위가 곁방살이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이를 문제 삼아 “단군사당을 별도로 세우고 단군신위를 남향하게 하며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제대로 제사하게 하는 것이 왕조의 체통에 맞는 일”이라는 글을 올렸고 세종은 즉시 이를 허락했다.
그런가 하면 정조 10년 8월 9일에 임금은 승지 서형수(徐瀅修)에게서 다음과 같은 보고를 받고 단군묘의 알뜰한 관리를 명했다. “신이 강동(江東)에서 벼슬할 때 고을 서쪽 300리쯤에 둘레가 410척쯤 되는 무덤이 있었는데 고을 노인들이 단군묘라 했고, 이는 유형원이 쓴 ‘여지지(輿地誌)’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모르나, 중국 사람들은 죽은 후에 신령이 되었다는 황제(黃帝)가 교산(喬山)에 신발을 남겼고, 공동산(공동山)에 그의 무덤이 있다고 믿고 이를 전하고 있는 터이니, 이렇게 전해지는 국조의 묘에 대한 일들을 소홀히 하는 것은 흠결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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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06100483577901
[ 송진우 ]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유공자정보
관리번호2883
성명
송진우
한자宋鎭禹
생년월일1890-05-08사망년월일1945-12-30
본적전라남도 담양
포상정보
운동계열문화운동포상년도1963훈격독립장
관련정보
2021년 08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공훈록
공적개요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6권(1988년 발간)
전라남도 담양(潭陽) 사람이다.
1906년 창평(昌平)의 영학숙(英學塾)에서 김성수(金性洙)와 함께 수학하고, 1908년 김성수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1915년에 명치(明治)대학 법과를 졸업하였다.
유학기간중에 유학생친목회(留學生親睦會)를 조직하고 총무로 활동했으며 「학지광(學之光)」을 편집하였다.
1915년에 김성수를 도와 당시 경영난에 빠져 있던 중앙학교(中央학교)를 인수하여 학감(學監)이 되었다가 김성수의 뒤를 이어 1918년 3월에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송진우의 관리 아래 중앙학교의 교육은 민족교육을 관철했으며 수많은 애국적 청소년들을 배출하였다.
1919년 1월 동경 유학생 송계백(宋繼白)이 2·8독립선언 준비차 귀국하여 송진우를 만난 것을 계기로 하여 송진우·현상윤(玄相允)·최린(崔麟)·최남선(崔南善) 등이 빈번히 회합을 열고 초기의 3·1운동을 기획하기 시작했으며 송진우는 천도교측과 기독교측의 연합을 주선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난 후 이 운동을 초기에 기획한 48인의 하나로 지목되어 일제 경찰에 붙잡혀 서대문감옥에 구금되었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무죄선고를 받았으나 실질적으로 1년 6개월간의 옥고를 겪었다.
1921년 9월 14일 동아일보(東亞日報)가 「주식회사 동아일보」로 개편되자 제3대 사장에 취임하였다.
1922년 11월 이상재(李相在)를 대표로 하고 지도급 인사 47명이 조선민립대학 기성회(朝鮮民立大學期成會)를 발기할 때 발기인으로 참가하여 이 사업을 적극 추진했으며, 동아일보를 통하여 민립대학설립 운동을 적극적으로 선전하였다.
1923년 3월 29일 각계 대표 400명이 서울 종로 중앙청년회관에 모여 조선민립대학기성회 발기총회를 개최하여 전국적으로 1천만원의 기금을 모집하여 재단을 구성하고 민립종합대학을 설립하기로 결의한 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4년 4월 친일파 박춘금(朴春琴)의 권총협박사건으로 동아일보 사장을 사임하고, 1924년 동아일보사 고문, 1925년에는 동아일보 주필(主筆)로 취임하여 언론활동을 하였다.
1925년 7월 미국 하와이에서 태평양연안 기독교청년회 주최로 범태평양회의(汎太平洋會議)가 개최되자 미국으로부터 참석한 서재필(徐載弼)과 함께 국내대표로 암석하여 활동하였다.
1925년 9월 일제 총독부가 「개벽(開闢)」잡지를 발행정지 시키자 한기악(韓基岳)·민태원(閔泰瑗) 등과 함께 일제의 언론탄압을 비판하고 교섭하여 발행정지의 해제를 얻는데 성공하였다. 또한 「신천지(新天地)」와 「신생활(新生活)」의 필화사건이 일어나자 박승빈(朴勝彬) 등과 함께 언론자유의 옹호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1925년 11월에 함경남도 함흥경찰서가 시대일보(時代日報) 지방부장 홍남표를 불법 체포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안재홍(安在鴻)·이종린(李鍾麟) 등과 함께 무명회(無名會)의 교섭위원으로서 그의 석방을 위하여 투쟁하였다.
1926년 3월에 국제농민회 본부로부터 조선농민에게 전하는 글을 동아일보 3월 5일자에 게재했다가 동아일보가 제2차 무기정간을 당함과 동시에 동아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이던 그와 편집 겸 발행인 김철중(金鐵中)이 일제 검찰에 구속 기소되어 1926년 3월 2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그는 징역 6월형, 김철중은 징역 4월형의 선고를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7년 10월 제6대 동아일보사장에 취임했으나, 1936년 8월 베를린 올림픽대회의 마라톤에서 손기정(孫基禎) 선수가 우승하자 동아일보가 손기정선수의 우승사진을 게재하면서 손선수의 앞가슴에 붙인 일장기(日章旗)를 지우고 실은 「일장기 말소사건」이 문제가 되자 동아일보는 제4차 무기정간을 당하고 그도 사장을 사임하였다.
1945년 8·15광복 후에는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을 조직하여 수석총무로서 활동하다가 한현우(韓賢宇)에게 암살당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2&pageTitle=Merit&mngNo=28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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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촌(仁村) 김성수(金成洙,1891~1955)의 증언 기록
「중앙학교의 숙직실은 새로 지은 교사 앞 운동장의 동남 편에 있었다. 조그만 기와집이었다. 오늘날에는 화강암 석조 대강당이 있는 터였다. 지금은 다른 곳에 옮겨서 옛날의 숙직실을 복원했고 원래 숙직실 자리에는 ‘3.1운동 책원지(策元地)’라는 기념비가 서있다.
이 숙직실은 일제 초기 가장 우수했던 민족의 수재들이 드나들었던 아지트였을 뿐 아니라 후에는 3.1운동의 모의 장소가 되기도 했고 인촌(仁村)과 고하(古下)의 살림집이기도 했다. (중략)
1918년 12월 어느 날 워싱턴에서 재미 동포들과 구국운동을 하고 있던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이 밀사를 보내왔다.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론의 원칙이 정식으로 제출될 이번 강화회의를 이용하여 한민족의 노예생활을 호소하고 자주권을 회복시켜야 한다. 미국에 있는 동지들도 이 구국운동을 추진시키고 있으니 국내에서도 이에 호응해주기 바란다.”
밀사(密使)는 이런 내용의 밀서(密書)를 휴대하고 있었다.
仁村-古下-幾堂 등 세 사람은 ‘이제야 말로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절박감을 느끼고 숙직실 방안에 머리를 맞대고 앉아 어떻게 할까를 논의했다. 그러나 당장 묘안이 없었다. 거국적인 항일 독립운동을 주도해야 된다는 목표는 설정되었다.」
(동아일보사 발행 [仁村 金性洙-사상과 일화] 1985.6.25.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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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newdaily.co.krsitedatahtml202301072023010700038.html
이승만 건국사(13) 김성수가 말하는 이승만의 '3.1운동 밀사'
인보길 기자
2023-01-07
이아주 여사 독립만세 시위 주도 … 仁村선생 부인
2005-02-23
22일 독립유공자(대통령 표창)로 확정 발표된 이아주(李娥珠·1899∼1968·사진) 여사는 3·1운동에 가담했다가 체포된 뒤 재판에서도 끝까지 굴하지 않았던 독립운동가이다.
이 여사는 동아일보 사장과 중앙학교·보성전문 교장을 지낸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 선생의 부인이기도 하다. 국가보훈처 포상 신청 당시 여사의 이름을 이아수(李娥洙)로 잘못 표기했다고 유족 측은 밝히고 있다.
이 여사는 정신여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9년(당시 20세) 3월 5일 서울 남대문역 앞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일경에 체포됐다. 이 여사는 혹독한 경찰 조사 때는 물론 공판 과정에서도 “다시는 이런 행동을 하지 않겠다면 관대히 처분하겠다”는 재판관의 회유를 일축한 채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다 6개월 실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이 여사는 “정숙한 이 내 몸에 포박이 웬 말인가. 청춘의 끓는 피 참기 어려워 울음이 목맺히도다”는 옥중 시로 세인의 가슴을 울리기도 했다(동아일보 1920년 4월 20일자 3면).
인촌 선생은 일본 도쿄유학생 시절부터 친했던 김우영(金雨英) 변호사의 첫 변론을 지켜보러 나왔다가 당당하고 정연하게 진술하는 이 여사의 모습에 크게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부인과 사별했던 인촌 선생과 이 여사는 1921년 1월 결혼했다.
중앙학교와 보성전문에서 영재를 키우다
식민지 조국의 독립은 진정한 교육에서 출발한다는 것이 인촌 김성수의 일관된 신념이었다. 1914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인촌 김성수는 사립학교 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그는 최남선(崔南善 1890-1957) 안재홍(安在鴻1892-1965) 등 일본 유학시절 만났던 친구들과 함께 관련 자료를 모아 1915년 봄 백산학교라는 이름의 사립학교 설립안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첫 시도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좌절당해야 했다.
그러던 차에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있던 중앙학교로부터 운영을 맡아달라는 의뢰가 들어왔고 김성수는 젊은이들에게 민족혼을 일깨우겠다는 신념에 따라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는 중앙학교 인수를 지나친 모험이라고 생각하는 부모를 설득하고 인수 비용을 얻어내 1915년4월 중앙학교를 인수했다. 김성수가 동경 유학시절부터 키워왔던 민족교육의 꿈이 처음으로 실현된 것이다.
중앙학교를 인수한 김성수는 근대적인 경영방식을 도입, 학교 운영을 근대적 합리적으로 바꿔나갔다. 김성수는 그곳에서 직접 영어와 경제를 가르쳤으며 1917년엔 중앙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했다. 그해 12월엔 서울 종로구 화동에서 종로구 계동의 근대식 건물로 학교를 옮겼다.
김성수의 노력에 힘입어 중앙학교는 사학의 명문으로 성장해나갔다. 특히 한국어 교습이나 민족주의 교육을 통해 민족 교육의 요람으로 자리잡았다. 그것은 3·1운동에서 수행했던 중앙학교의 역할을 보면 잘 드러난다. 김성수는 물론이고 당시 중앙학교 교장이었던 송진우(宋鎭禹 1894-1945) 등은 3·1운동의 준비 과정에서 지대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1918년 겨울부터 중앙학교의 숙직실은 3·1운동의 준비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김성수와 중앙학교는 이처럼 막후에서 3·1운동에 큰 공을 세웠다. 뿐만 아니라 1926년 순종의 국장일에 있었던 6·10 만세운동도 중앙학교 학생들의 주도로 이뤄진 것이었다. 김성수는 중등교육 못지않게 고등교육의 중요성도 절감했다. 식민지라는 여건 때문에 유능한 젊은이들이 고등교육을 포기하거나 외국으로 나가야 하는 현실을 지켜본 김성수는 그것이야말로 민족의 손실이라고 생각했다. 김성수는 1932년6월 재정난을 겪고 있던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했다. 그는 유럽과 미국 유수의 대학을 둘러보고 그들의 선진적인 제도와 시스템을 보성전문학교에 도입하는 등 광복 때까지 보성전문학교에 깊은 애정과 관심을 쏟았다.
김성수의 노력으로 보성전문학교는 발전을 거듭했고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했다. 그러나 1938년 이후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하면서 보성전문학교도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보성전문의 민족교육에도 탄압이 가해지면서 그 교육이 직업교육의 수준으로 제한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김성수와 보성전문학교의 교수진은 일제의 창씨개명 강요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한국 이름을 끝까지 지켜냈다. 그것은 보성전문학교의 힘이었다. 김성수와 보성전문학교는 일제의 탄압을 뚫고 민족 정신을 지켜냈다. 보성전문학교는 1946년엔 종합대학 고려대학으로 발전, 지금까지 한국의 민족대학으로서의 명성을 드날리고 있다.
httpwww.inchonmemorial.co.krhtmlinchonm_inchon_think2.html
삼천리 제4권 제10호
1932년 10월 01일
金性洙氏에게 民立大學를 만드서요, 一代의 最大事業으로
金性洙氏에게 民立大學를 만드서요, 一代의 最大事業으로
지금 多數의 사람들은 半島에 權威잇는 대학 하나가 출현되기를 기대하는 경향이 만슴니다.<8> 그리고 그 기대를 達하여주는 큰 교육가와 사업가가 하로 급히 출현하기를 바라고 잇슴니다.
생각건대 선생은 10여년래로 中央학교을 위시하야 普成전문학교 등 큰 학원을 여러개 붓드시고 수십만의 巨財를 投하야 영재교육에 진력하시는 터이라 更進一步하야 다수한 사회인민이 기대하는 이 대학을 창설하시지 안으렴니까.
벌서 지난번 선생이 普成전문학교를 인수 경영하자 다수한 世人은 그를 대학창설의 첫 階段이라고 보고서 압날을 기대하는 경향이 잇섯슴니다. 듯건대 대학이 창설되자면 100만원의 巨財가 잇서야 하리라데 이만한 거금을 움지길 수 잇는 분으로는 선생도 유력한 그 중의 한분이 될 줄 암니다.
선생은 대학을 만드러 이 민족의 문화에 큰 광명을 던저 주시지 안으렴니까.
金性洙氏 答
나에게 그러케 과분한 기대를 가저주신다니 감사함니다. 2천만명이나 사는 큰 땅더리안에 官立대학이 겨우 한낫밧게 업다는 것은 前代의 찬란한 민족문화를 계승하고 잇는 우리니만치 더욱 붓그러운 일이외다.
年前 民立대학운동이 起할때 얼마나 그의 실현을 기대하엿든가 함은 방방곡곡의 數萬人士의 열성을 통하야 넉넉히 짐작할 수 잇는 일로 그동안에 비록 세월이 흘너지낫스데 대학창설을 기대하는 생각에는 조곰도 변함이 업섯다고 생각함니다.
그런데 대학에 대하여는 나는 아직 구체적으로 생각하여보지 못하엿슴니다. 그러나 單科대학 하나 만들재도 건물 基地에 20만원, 도서관 30만원, 정부에 바치는 보증금 50만원 그리고 年年 유지비의 재원으로 100만원 그려니 적어도 200만원을 쥐고야 실현이 됨니다, 그 거액의 돈이 잇서지리까 그러기에 지금 무에라고 책임잇는 답변은 하기 어럽슴니다만은 나도 그의 출현을 열열히 희망하고 잇는 이 땅 사람중의 한아인줄만 아려주십시오.
민족자본 민족기업 ‘경방’을 세우다
인촌 김성수는 청년기 일본유학의 경험을 통해 민족자본으로 만든 기업이 있어야만 민족의 내일을 기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신념은 경성방직 설립으로 이어졌다. 경성방직은 한국 최초의 근대적 방직공장이자 민족기업이었다.
김성수는 식민지시대 의류와 직물 섬유 대부분이 일본으로부터 수입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한국의 산업 활성화를 위해 방직산업부터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경성방직 설립의 첫단계는 1917년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경성직뉴주식회사를 인수한 것이었다. 김성수는 2년전인 1915년 중앙학교를 맡으면서 학생들로 하여금 국산 무명옷을 교복으로 입게했을 때 이미 한국의 직물 발전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각오했던 터였다.
김성수는 경성직뉴를 근대적 면 옷감 생산 시스템으로 개조, 중앙상공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꾸었고 1918년부터는 면의류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1919년10월 그는 경성직뉴와 별도로 경성방직을 설립했다. 한국 자본으로 세워진 순수한 민족 기업이었다. 김성수는 민족 기업의 의미를 살리려면 더 많은 한국인들이 경성방직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경성방직을 주식회사로 만들었던 것이다.
경성방직은 당시 한국의 산업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일본으로부터 면직물 수입이 증가하면서 한국의 면직물은 거의 소멸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김성수의 경성방직 설립은 식민지 조국의 그같은 열악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대규모 생산을 시작한 일본인회사 조선방직에 맞서 한국의 면직물 산업과 한국 시장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이것은 경성방직이 민족자본으로 세운 민족기업임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단순히 하나의 기업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조국을 근대화시키고 민족의 생존권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결국 독립운동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김성수는 이후 각종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경성방직을 발전시켰다. 1923년부터 1935년까지 경성방직은 민족 산업의 파수꾼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그리하여 1939년엔 중국 만주에도 공장을 세움으로써 국내를 넘어 해외에도 투자를 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httpwww.inchonmemorial.co.krhtmlinchonm_inchon_think3.html
민족의 표현 기관 ‘동아일보’
인촌 김성수의 민족언론운동은 동아일보 창간으로 대표된다. 김성수는 일본 유학 이후 민족언론의 중요성에 큰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3·1운동 이전에는 일제의 철저한 언론 탄압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다 3·1운동 이후 조선총독부의 소위 문화정치로 인해 한글 신문 출판이 가능해지자 신문 창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1919년 경성방직을 설립한 직후여서 재정적으로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신문 창간은 한국인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의 일환이라는 신념은 확고했다. 담보물을 저당 잡혀 대출을 받는 등 각고의 노력 끝에 1920년 4월1일 드디어 동아일보 창간호를 냈다. 동아일보는 당시 한국인들의 억눌린 한을 풀어주고 민족정신을 고양시켜주는 터전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만큼 일제 탄압이 가중된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창간호가 간행된 지 보름밖에 되지 않은 1920년4월15일 총독부는 평양에서의 반일시위를 보도했다는 이유를 달아 창간 이후 처음 동아일보의 판매와 배포를 금지했다. 동아일보는 이후 총독부에 의해 기사삭제 압류 배포금지 정간을 당하는 등 끝없는 탄압을 받아야 했다. 김성수는 동아일보를 통해 민립대학 설립운동, 물산장려운동, 문맹 타파 운동, 한글 운동 등을 적극 주도함으로써 민족주의 문화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해나갔다.
그는 또 1931년과 1933년 월간 신동아와 신가정을 창간해 다양한 매체를 통해 이같은 문화운동을 펼쳐나갔다. 김성수와 동아일보의 민족정신은 1936년 일장기 말소 사건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1936년 8월25일자 동아일보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孫基禎) 선수의 사진을 게재하면서 가슴의 일장기를 지워 없앴다. 일제가 가만 있을리 만무했다. 총독부는 곧바로 동아일보를 무기한 정간시키는 등 갖은 탄압을 자행했다. 하지만 동아일보는 그에 굴하지 않고 이듬해인 37년6월3일 다시 발행되었다.
동아일보는 일제의 영구 폐쇄 음모로 인해 결국 40년8월10일 폐간됐고 광복 후인 45년12월1일 다시 발행됐다. 5년간의 공백기였지만 민족혼과 민족문화를 고양시키려는 김성수와 동아일보의 민족정신까지 중단된 것은 아니었다.
httpwww.inchonmemorial.co.krhtmlinchonm_inchon_think4.html
1920.4.1. 동아일보 창간사
[ 主旨를 宣明하노라 ]
주지를 선명하노라
창천에 태양이 빛나고 대지에 청풍이 불도다. 산정수류 하며 초목창무 하며 백화난발 하며 연비어약 하니 만물 사이에 생명과 광영이 충만하도다.
동방 아세아 무궁화 동산 속 2천만 조선 민중은 일대 광명을 견하도다, 공기를 호흡하도다. 아, 실로 살았도다, 부활하도다. 장차 혼신용력을 분발하여 멀고 큰 도정을 건행코자 하니 그 이름이 무엇이뇨, 자유의 발달이로다.
세계 인류 운명의 대륜은 한번 회전하도다. [쯔아]는 가고 카이사는 쫓기도다. 자본주의의 탐람은 노동주의의 도전을 받고 강력에 기본한 침략주와 제국주의는 권리를 옹호하는 평화주의와 정의를 근본한 인도주의로 전환코자 하는도다.
그런 즉 인민으로 말미암은 자유 정치와 노동으로 말미암은 문화 창조와 정의 인도에 입각한 민족 연맹의 신세계가 전개하려 하는 것이 아닌가.
오인은 몽상가가 아니라 또한 현실에 즉 한 자로다. 어찌 이상과 하늘만 보고 사실과 땅을 망각하리오. 세계의 대세를 여실히 논할진대 일편에 신세력이 있는 동시에 우일편에 차와 대립하는 구세력이 있어 서로 쟁투하난도다. 환언하면 정치로나 경제로나 사회로나 문화로나 각 방면에 해방과 개조의 운동이 있는 동시에 곧 이 모든 것을 억압하려하는 일대 운동이 존재하도다. 이는 사실이라 뉘 감히 부인할 바이리오. 오호라 신구 충돌과 진보 보수의 다툼이 어찌 이 시대에 만 특유한 바리오, 온 역사를 통하여 상존하는 것이로다.
그러하나 일양내복에 적설견빙이 융해하고 백화만물이 각서기생함은 그때가 옴이라 누가 능히 팽연한 춘의 힘을 억거하리오. 이와 같이 신구의 충돌은 이미 신의 올 때 됨을 표시함이오 구의 갈 때 됨을 명고 함이라, 필연의 세는 인력으로 좌우하지 못할 바라, 신이 기필코 성공하고 구가 반드시 퇴거하리니.
오인은 신시대가 이미 왔다 아니하노라, 신세계가 벌써 전개되었다 아니하노라, 오직 흑암중으로서 쟁투로써 해산의 고를 가지고 웅웅한 신문명의 파와 명명한 신시대의 서광이 멀리 수평선상에 보이도다 하노라.
보이도다 보라, 2천만의 남녀 민중이 그를 향하여 노력하는 것을.
이러한 때에 동아일보는 생하도다, 회라 그 생이 어찌 우연하리오.
회고컨대 일한합병 우자십년 그 사이에 조선 민중은 일대 악몽의 습한 바 되었도다. 그가 또한 사람이라 어찌 사상과 희망이 없었으리오. 그러나 능히 서치 못하며 그가 또한 사회라 어찌 집합적 의사와 활력의 충동이 없었으리오. 그러나 능히 달치 못하며 그가 또한 민족이라 어찌 고유한 문명의 특장과 생명의 미묘함이 없었으리오. 그러나 감히 발치 못하였으니, 실로 개인이 간혹 경험하는 바 부르짖고자 하되 개구치 못하며 달음질하고자 하되 용신치 못하는 그 악몽에 조선 2천만 무고 민중은 빠졌었도다.
이는 곧 사지라, 함정이라, 자유와 발달을 기하지 못할 곳이었도다. 조선 민중은 실로 고통을 감하도다. 혹은 울고 혹은 노하였도다. 어찌 현대 민중뿐이라 하리오. 4천년 역사적 생명이 분개하도다. 그는 조선 인민이 홀로 그 생을 달치 못하며 그것을 득지 못함으로 말미암음이라.
그러나 때가 한번 변하여 언론 자유가 다소 용인된다 하매 조선 민중은 그의 의사를 표현하며 그의 전도를 인도하는 친구가 될 자를 열망으로 기대하였도다.
이에 동아일보가 생하였으니 그가 어찌 우연하다 하리오. 실로 민중의 열망과 시대의 동력으로 생하다 하노라.
주지를 좌에 선명함으로써 창간사에 대하고자 하노라.
(1) 조선 민중의 표현기관으로 자임하노라.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소수 특권 계급의 기관이 아니라 단일적 전체로 본 2천만 민중의 기관으로 자임한 즉 그의 의사와 이상과 기도와 운동을 여실히 표현하며 보도하기를 기하노라.
(2) 민주주의를 지지하노라.
이는 국체나 정체의 형식적 표준이 아니라 곧 인류 생활의 일대 원리요 정신이니 강력을 배청하고 인격에 고유한 권리 의무를 주장함이라, 그 용이 국내 정치에 처하여는 자유주의요, 국제 정치에 처하여는 연맹주의요, 사회생활에 처하여는 평등주의요, 경제 조직에 처하여는 노동 본위의 협조주의라. 특히 동아에 재하여는 각 민족의 권리를 인정한 이상의 친목단결을 의미하며 세계 전국에 재하여는 정의 인도를 승인한 이상의 평화 연결을 의미함이라. 경언하건대 그 체는 폭력 강행을 불가라 하고 양심의 권위와 권리의 주장으로써 인생각반의 간계를 규율코자 함이니 고자의 소위 왕도의 정신이 곧 이것이라, 오인은 천하 인민의 경복과 광영을 위하여 이를 지지하노라.
(3) 문화주의를 제창하노라.
이는 개인이나 사회의 생활 내용을 충실히 하며 풍부히 함이니 곧 부의 증진과 정치의 완성과 도덕의 순수와 종교의 풍성과 과학의 발달과 철학 예술의 심원오묘라, 환언하면 조선민중으로 하여금 세계 문명에 공헌케 하며 조선 강산으로 하여금 문화의 낙원이 되게 함을 고창하노니 이는 곧 조선 민족의 사명이 요 생존의 가치라 사유한 연고라.
요컨대 동아일보는 태양의 무궁한 광명과 우주의 무한한 생명을 천리 강산 천만 민중 가운데 실현하며 창달케 하여 자유발달의 국을 맺고자 하노니 (1) 조선 민중이 각정성명하여 보합대화하는 일대 문화의 수립을 기하며 (2) 천하 만중이 각득기소 하여 상하여 천지로 동류하는 일대 낙원을 건설함에 동력공조 하기를 원함은 본 일보의 주지로다.
그러나 본사의 전도가 심히 험하도다, 그의 운명을 누가 가히 예측하리오, 오인은 오직 민중의 친구로서 생사 진퇴를 그와 더불어 같이 하기를 원하며 기하노라.
[동아일보 30000호] 칠흑 어둠속, 해방의 열망으로 동아일보가 태어났노라
2018-01-26
1920년 4월 1일자 창간사, 현대 문장으로 소개합니다
《엄혹했던 일제강점기, 동아일보 창간은 역사의 책무이자 시대의 희망이었습니다. 1920년 4월 1일자 창간호 1면에 실린 창간사는 이러한 취지에 걸맞게 생명력 가득한 명문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다 보니 이 시대의 우리가 옛 문투의 창간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다소 어려운 일이 되었습니다. 이에 쉽고 편안한 문장으로 바꿔 독자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그 의미를 함께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푸른 하늘에 태양이 빛나고 드넓은 대지에 맑은 바람이 불도다. 산하엔 초목이 무성하고 온갖 꽃들이 만발하며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힘차게 뛰어오르니 천하 만물에 생명과 광명이 충만하도다.
동방의 무궁화동산, 2000만 조선 민중은 새로운 공기에서 호흡하며 새로운 빛을 목도하노라. 이는 실로 살아 있음이고 부활이다. 혼신의 힘으로 저 먼 길을 가고자 함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자유의 발달이다.
세계 인류의 운명은 지금 일대 전환점을 맞았도다. 차르 황제나 카이저 황제 같은 구시대의 발상은 떠나가고, 자본의 탐욕은 신성한 노동의 도전에 직면했으며, 무력에 기초한 침략주의 제국주의는 평화 정의 인도주의에 길을 내주는 형국이다. 인민 노동 정의에서 비롯된 자유정치 문화창조 민족연맹이 우리 앞에 신세계를 펼쳐 보이도다.
강제병합 10년, 민중은 악몽의 늪에
우리는 몽상가가 아니라,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사람들이다. 어찌 하늘과 이상만 바라보고 이 땅과 현실을 망각하리오. 세계의 대세를 있는 그대로 논하고자 함이니, 한쪽엔 새로운 세력이 있고 또 한쪽엔 이와 대립하는 구세력이 있어 서로 투쟁하는 형국이 아닐 수 없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서 해방과 개혁의 운동이 있는가 하면 이를 억압하려는 움직임이 분명 존재한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아, 신구의 충돌과 진보 보수의 다툼이 어찌 이 시대에만 있는 일일까. 그건 인류 역사 어느 시대에도 늘 있어 온 일이었다.
추위가 가고 볕이 다시 드니, 쌓인 눈과 단단한 얼음이 녹고 온갖 만물이 하나둘 다시 살아나도다. 이는 분명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의미한다. 그 의연한 봄의 전령을 누가 감히 거부할 것인가. 신구의 충돌은 그 자체로 새로운 시대에 들어섰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북소리를 울려 옛 시대의 몰락을 알리는 것이다. 저 도도한 흐름은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새로운 시대가 분명 승리할 것이다.
억압 뚫고 新시대의 서광 한줄기가
물론, 이미 새로운 시대가 왔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새로운 세계가 벌써 전개되었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칠흑 같은 어둠이지만, 투쟁과 진통을 거쳐 저 멀리 수평선에 신문명의 웅대한 한 자락과 신시대의 서광 한 줄기가 보이기 시작하도다. 자 보라, 서광 한 자락을 위해 수천만 민중이 하나같이 모두 몸부림치고 있음을.
이러한 시대에 동아일보가 태어났도다. 아, 동아일보 창간을 어찌 우연이라 할 것인가. 돌아보건대 한일강제병합이 일어난 지 10년, 그 사이에 조선 민중은 일대 악몽의 늪에 빠져야 했다. 조선 민중은 그 또한 사람인지라 어찌 사상과 희망이 없었을까만 그것을 드러낼 수 없었다. 그 또한 사회인지라 어찌 집단적 의사 표현의 충동이 없었을까만 능히 이뤄내지 못했다. 그 또한 민족인지라 어찌 고유한 문명의 특장과 생명의 미묘함이 없었을까만 그것을 드러내지 못했다. 부르짖고 싶어도 부르짖을 수 없었고, 달음질치고 싶어도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었다. 지난 10년, 2000만 조선 민중은 그렇게 악몽에 빠져 있었다.
그렇기에 그곳은 바로 사지(死地)였고 함정이었다. 자유가 사라져 발전을 기약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조선 민중은 실로 고통스러웠다. 혹은 울고 혹은 노하였다. 그 분노, 어찌 지금 여기 살고 있는 우리들만의 분노일 것인가. 조선 민중의 삶은 늘 이 땅의 역사와 함께했으니, 4000년 역사적 생명까지 모두 분개하도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여 언론의 자유가 다소 용인된다고 하니, 조선 민중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그것을 전달해주는 친구를 열망하고 기대하고 있다. 이에 동아일보가 세상에 태어났으니 그것을 어찌 우연이라 말할 수 있으리오. 실로 민주의 열망과 시대의 동력으로 태어난 것이다.
민주-문화주의 지지하는 민족 언론
이에 그 뜻을 선명하게 밝힘으로써 창간사를 대신하고자 한다.
1. 조선 민중의 표현기관으로 자임하노라.
소수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특권계급의 기관이 아니라 2000만 민중 전체의 기관으로 자임한다. 그 민중의 의사와 이상과 목표와 희망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보도할 것을 약속하노라.
2. 민주주의를 지지하노라.
이는 국체(國體)나 정체(政體)의 형식적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 삶의 원리이자 정신을 의미한다. 무력을 배척하고 개인의 인격에 기초한 권리와 의미를 주장한다. 따라서 국내 정치에서는 자유주의요, 국제 정치에서는 연맹주의다. 사회생활에서는 평등주의요, 경제에서는 노동 본위의 협조주의다. 특히 동아시아에 있어선 각 민족의 권리를 인정하며 친목과 단결을 추구한다. 전 세계에 있어서는 정의와 인도를 승인하고 평화를 추구한다. 다시 말하건대, 폭력과 무력을 거부하고 양심을 존중함으로써 삶의 다양한 관계를 규율코자 함이니, 옛 왕도의 정신이 바로 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만천하 백성들의 경복(慶福)과 광영을 위하여 민주주의를 지지하노라.
3. 문화주의를 제창하노라.
이는 개인이나 사회의 삶을 충실하고 풍부하게 하기 위함이다. 곧 부를 증진하고, 정치를 완성하고, 도덕을 순수하게 하고, 종교를 풍요롭게 하고 과학을 발전시키고 철학과 예술을 심원하고 오묘하게 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조선 민중이 세계 문명에 공헌할 수 있도록 하고 삼천리강산을 문화의 낙원으로 만들기 위해 소리 높여 외치는 것이니, 이는 곧 우리 조선 민족의 사명이요 생존의 가치가 아닐 수 없다.
요컨대, 동아일보는 태양의 무궁한 광명과 우주의 무한한 생명을 삼천리강산, 2000만 민중 속에서 실현하고 나아가 자유의 발달에 이르고자 한다. 그리하여 1) 조선 민중이 각자의 인성과 천명을 바르게 하고, 서로 화합하는 문화를 수립하도록 하고 2) 조선 민중이 자신의 위치에서 차별 없이 일대 낙원을 건설하는 데 힘을 모으도록 하는 것이 동아일보 창간의 근본적인 취지다.
2000만과 생사진퇴 함께하길 약속
그러나 동아일보의 앞날은 심히 험난하도다. 그 운명을 과연 누가 예측할 것인가. 그럼에도 우리는 오직 조선 민중의 동지로서, 그들과 더불어 생사 진퇴를 함께하기를 약속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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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180125883657291
* 1924.1.1. 동아일보 「새봄을 當하야」
[ ...... 가튼 朝鮮人間의 계급적 대립을 보게함은 策의 可한 者아니라. 朝鮮人은 위선 대동단결 ..... 위선 ... 朝鮮민중의 실생활 조건을 향상케 함이 가하다 ..... 경제는 진화하는 것이오. 躐等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은 조건이 잇서야 되는 것이오. .... 절급한 것은 朝鮮人 자체의 생산력 발전을 기도하는 一事 ......... ]
개벽 제43호
1924년 01월 01일
皆自新乎 - 最近一年中의 社會相
新元劈頭의 新事端續出
大正 9년 以降, 은근히 朝鮮社會에 세력을 가진 엇던 新來의 사회주의가 大正 12년인 작년에 이르러는, 아조 깨즛하게 머리를 들어 내엿다. 신년벽두의 제1일에는, CC당의 일홈으로 사회혁명 만세의 불온 연하장이 서울 안에 퍼지여, 관민의 눈이 다-가티 휘둥굴엇스며, 4일에 國一館에서 열닌 紳士給의 新年懇親會席上에 고학생 一群의 노호가 잇고, 8일에 주간 新生活이 발행 금지를 당하며, 仍해서 16일에는 「新生活」사건에 관계된 朴熙道, 金明植, 辛日鎔, 兪鎭熙, 자유노동자 조합사건에 관계된 李時雨, 金思民등에 대한 판결 언도가 잇서, 사회주의에 대한 논의는 극도도 성행되엿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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注目되는 東亞日報의 論調
사회주의의 사조가 경향을 통하야 불니듯이 일어나는 이 때에, 朝鮮에 유일한 언론기관인 東亞日報는 이에 대한 정면으로의 사회혁명 불가론을 제창하엿다. 신년 제1호의 「새봄을 當하야」의 사설에, 朝鮮人은 정치적 파멸로부터 다시 경제적 파멸에 드러간다는 말을 하고, 다시 「이를 구제키 위하야는 혹은 정치혁명을 주장하고, 혹은 사회혁명을 주장하나, 徒히 계급의식을 고취하야, 가튼 朝鮮人間의 계급적 대립을 보게함은 策의 可한 者아니라. 朝鮮人은 위선 대동단결하되, 어느 정도까지의 유 무산자 兩級의 타협을 도하고, 위선 할 일로서는, 각양의 문화적 노력에 의하야 朝鮮민중의 실생활 조건을 향상케 함이 가하다하고, 尙 又 제2일의 사설에는 논조를 또 한 번 나위여, 「경제는 진화하는 것이오. 躐等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은 조건이 잇서야 되는 것이오. 결코 조건이 업시는 되는 것이 아니라 하야, 생산력이 발달치 못한 朝鮮에는 도저히 무산자 사회의 現出을 기할 수가 업다고 논단하고 다못 절급한 것은 朝鮮人 자체의 생산력 발전을 기도하는 一事라 하엿다.
東亞日報의 이러한 주장은 일부 중산급 이상의 편에서는<131> 물론 환영하엿스나, 신진주의자를 위시한 대다수의 민중은 날이 감을 따라서 점차 이를 반대하게 되엿다. 심한 자는 東亞日報로써 朝鮮에 대한 白色運動의 前衛라고 말하기 까지에 니르럿다.(이상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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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5
[ 韓國人工場 2,005個, 生産品價額 69,226,754圓 從業者 韓國人 70,281人
日本人工場 2,085個, 生産額價額 226,902,112圓 從業者 日本人 6,363人 ]
朝鮮總督府統計年報 1925年度 第8編 第110表
1925年末 現在 工場數는 4,238個, 資本金 265,853,369圓, 從業者 80,375人(韓國人 70,281人, 日本人 6,363人, 其他外國人 3,731人), 原動力은 機關數 2,370, 馬力數 123,949, 生産品價額 337,249,418圓인바 이를 다시 官公署 및 內外國人別로 보면 官公署工場 70個, 生産品價額 36,941,480圓, 韓國人工場 2,005個, 生産品價額 69,226,754圓, 日本人工場 2,085個, 生産額價額 226,902,112圓, 中國人工場 72個 生産品價額 1,042,961圓, 其他外國人工場 6個, 生産品價額 3,136,111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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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 工場數 5,927 職工數 148,977人 工場生産額 709,866,000圓 ]
六. 工業
○ 工場 : 年末의 現在 工場數는 5,927인데 前年에 比해 292(5.2%)가 增加하였다. 工場을 大別하면 食料品工業이 2,258로 가장 많아 額數의 38.1%를 占하고, 化學工業이 1,425(24.0%)로 그 다음이며 그밖에는 훨씬 내려와서 紡織工業이 402, 機械器具工業·窯業이 300臺, 金屬工業·製材 및 製品工業·印刷 및 製本業이 200臺, 가스 및 電氣業이 50, 其他工業이 260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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工業의 職工數는 148,977人인데 前年에 비해 13,002人(9.6%)이 增加하였다. 職工은 化學工業의 41,972人의 最多로 總人員의 28.2%를 점하고 紡織工業 33,830人(22.7%), 食料品工業 32,617人(21.9%)이 많은 편이다. 그밖에는 훨씬 내려와서 窯業 8,269人, 機械器具工業 7,939人, 金屬工業·印刷 및 製本業이 각각 6,000人臺, 製材 및 木製品工業이 4,906人, 가스 및 電氣業 812人, 其他工業이 5,394人이다.
職工中 男工은 98,249人(66.0%), 女工은 50,550人(34.0人)인데 紡織工業 發達과 함께 점차 女工의 比率이 높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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今年度의 工場生産額은 709,866,000圓인데 前年에 비해 7,552,000圓(11.9%)이 增加하였다. 生産額을 大別해 보면 食料品工業이 320,580,000圓으로 가장 많아 總額의 45.2%를 점하고 化學工業은 162,462,000圓(22.9%), 紡織工業은 90,378,000圓(12.7%), 가스 및 電氣業은 39,989,000圓(5.6%), 金屬工業은 28,366,000圓(4.0%)으로 많은 편이다. 그밖에는 훨씬 내려와서 窯業·製材 및 木製品工業은 19,000,000圓臺, 印刷 및 製本業은 12,427,000圓, 機械器具工業은 7,399,000圓, 其他工業은 10,003,000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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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침략하 한국36년사 11권 > 1936년 연도말 > 六. 工業
개벽 신간 제4호
1935년 03월 01일
朝鮮 民間新聞界 總評
黃泰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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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間 三新聞의 誕生과 其 經路
그때는 일반적으로 민족주의의 사상이 고조되엇든 때임으로 齋藤總督은 당시 각 방면의 말을 균등히 듣는다는 의미로 민족주의 편으로 李相協에게 東亞日報 親日本主義 閔元植에게 時事新聞, 당시 日鮮同化에 힘쓰는 단체라는 大正親睦會芮宗錫에게 朝鮮日報를 허가하야 각각 상응 발달을 하며 성장하는 것을 보려 하엿다.
그러나 당시의 정세로는 朝鮮과 시사는 완전히 東亞에게 압도된 감이 잇섯고 더욱 時事新聞만은 몃 달 못되어 外로 민중의 지지가 없고 안으로 재정난이 잇서 폐간되고 그 후로 朝鮮日報도 일시 경영난에 빠지게 되엇섯다.
그러나 東亞日報도 창간이래 聲勢만 놉핫슬 뿐이지 경영이 순조로운 것은 아니엇다. 年少氣壯한 논객들이 東亞日報를 중심으로 盛히두르는 論鋒은 총독부의 근본 방침에 저촉된 바- 만아 필경 정간의 액을 당하엿섯고 그것이 해금되는 동시에 不幾月에 金性洙가 중심으로 주식회사가 완성하야 제1대 사장으로 宋鎭禹가 취임하엿다.
이 동안에 朝鮮日報는 大正親睦會의 손에서 宋秉畯에게로 넘어가서 그가 사장의 지위에 잇섯스나 실제의 사장은 南宮薰씨가 대행하엿섯다. 南宮씨는 東亞의 신예에 비하야 斯界의 노장인 감이 잇섯스나 아모래도 그때의 朝鮮日報<14> 聲勢는 東亞에 미급한 점이 잇서 보엿다. 南宮씨는 이 중에 회사 성립에 노력하고 잇섯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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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서 총독부 탄압 견디며 자주역량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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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촌의 독립운동은 직접적인 운동과 간접적인 운동으로 나누어진다. 직접적인 운동은 중앙학교를 중심으로 3·1운동을 준비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간접적인 운동은 교육, 산업, 언론을 일으킴으로써 민족의 역량을 키우는 운동으로 나타난다.
중앙학교 숙직실은 새로 지은 교사 앞 운동장 동남 편에 있었다. 기당(幾堂) 현상윤(玄相允)이 1916년에 와세다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인촌의 부름을 받고 중앙학교 교사로 부임하게 된다. 김성수, 송진우, 현상윤은 숙직실에서 침식을 같이 하면서 학교일을 상의하고 민족의 장래를 설계했다.
1918년에 독일이 항복으로 1차 대전이 종료됨과 더불어 6월에 열린 베르사유 회담에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를 들고 나온다. 이러한 제창은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우리 지도자들의 독립에 대한 의식을 더욱 제고시켰고 국내에서도 일본의 무단정치에 시달리던 국내 각계 지도자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강하게 고취했다.
인촌, 고하, 기당 등의 중앙학교 팀도 이러한 분위기에 젖어서 밤낮으로 머리를 맞대고 숙의에 숙의를 거듭하게 된다.
여러 기관별로 독립운동에 대한 숙의가 일어났지만 그것은 실천의 결실을 보지 못하고 끝나고 말았다. 여기서 그러한 의식과 숙의를 결집시켜 행동으로 옮기는 데 중앙학교의 3인방 팀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천도교, 기독교, 동경유학생들, 학생단체 등이 서로가 만나게 하고 연결시켜 주고, 한데 모여서 합의를 도출케 하고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데 중앙학교 팀이 중심적 역할을 하고, 모의장소도 주로 숙직실이나 사택 또는 인촌의 가택이었다.
이 무렵 동경에서 2·8운동을 주도하던 백관수는 송계백에게 2·8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중앙학교 숙직실로 인촌, 고하, 기당을 찾아가도록 한다. 이들은 최남선을 불러 독립선언서를 읽어보도록 한다. 최남선은 감격하여 독립선언서를 인쇄할 수 있는 활자 보따리를 내주고 송계백에게 동경으로 가져가게 한다. 이때 인촌은 송계백에게 넉넉한 여비를 마련하여 준다.
인촌은 기왕 독립운동을 벌이려면 전국 방방곡곡의 백성들과 더불어 각계각층 지도자들을 전부 동원해서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서 천도교의 손병희 이외에 민족의 대표자들로 박영효, 유길준, 윤치호, 이상재, 한규설, 윤용구 등을 설득해서 합류시키기로 한다. 설득작업은 주로 고하와 육당이 맡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같이 거절하고 만다. 이런 상황에서 처음에 적극적이던 최린과 최남선마저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면서 뒤로 물러서게 된다.
이때 인촌은 종교단체가 천도교만 있는 게 아니고 기독교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면서 기당(幾堂)으로 하여금 기독교계의 원로 지도자이자 오산학교 설립자인 남강(南崗) 이승훈(李昇薰)을 교섭토록 한다. 기당은 이승훈과 동향인 김도태를 만나 이승훈으로 하여금 이 운동에 참가하도록 진지하게 부탁한다. 김도태는 정주에 내려가 이승훈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그런데 같은 날 같이 일으키자고 한 동경 유학생 측에서 2월 8일에 거사했다는 연락이 왔다. 초조와 불안 속에 있던 중 드디어 1919년 2월 11일 이승훈이 인촌 집으로 찾아오게 된다. 남강도 이미 2·8독립선언을 알고 어린 학생들까지 독립운동을 외치는데 국내에서 가만히만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다짐한다. 남강은 기독교계에는 감리교파와 장로교파가 있는데 이 두 파가 합치면 큰 힘이 될 것이라고 하며 자기가 앞장서겠다고 20대의 젊은이들을 안심시킨다. 이때 인촌은 활동자금으로 수천 원의 돈을 내놓았다.
기독교 단체로만 거사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중앙학교 숙직실 팀은 몸이 달았다. 우선 이렇게 되면 거국적인 운동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하는 이승훈을 찾아가 천도교와 같이해야 한다고 설득하지만 별로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다급해진 고하는 육당 최남선을 찾아가 사정을 알리자 육당은 남강, 고하, 기당과 같이 최린의 집을 찾아 간다. 여기서 우여곡절을 거쳐 비로소 기독교와 천도교가 연합전선을 펼치면서 구체적인 거사계획과 방법을 숙의하고 결정한다. 그리고 최린, 이승훈, 함태영 세 사람이 불교단체에도 참가할 것을 권유함으로써 한용운과 백용성이 합류하게 된다.
인촌이 이러한 모의과정에서 처음부터 일이 제대로 실천에 옮겨지지 않을까를 걱정하던 것을 이 모임에 참여한 이병헌의 기록을 보면 여실히 알 수 있다. 당시 인촌이 이야기한 내용이 지금도 귀에 들리는 것 같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백사(百事)에 유시(有始)면 유종(有終)이니 초지를 관철하여 목적을 달성하려면 성실 정려(精勵) 근면해야 하고 백절불굴의 일심으로 임사무의(臨事無疑)하며 물위심급(勿爲心急)하고 의리를 존중하고 친우 간에 신의를 잃지 말아야 한다. - 이병헌 “내가 본 3·1운동의 일 단면”
위의 글은 인촌의 평소 생활과 정신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일에는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어야 하는데 그 끝을 보려면 성실하고 정성을 기울여야 하고 백절불굴의 마음가짐으로 일단 일에 착수하면 의심하지 말고 일하는 사람끼리 신의를 생명처럼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인촌의 실천에 대한 강한 뜻이 담겨 있다. 또한 이 운동에 찬성과 더불어 참여한다고 말은 하여 놓고 나중에 소극적이고 회피적인 자세를 취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초조하고 불안해하는 심정도 담겨져 있다. 여기서 인촌의 실천의지가 얼마나 강한가를 알 수 있다. 인촌의 후속사업인 동아일보, 경성방직, 보성전문 등에도 3·1정신이 깊숙이 스며들고 있었다. 훗날 경성방직이 존폐의 위기에 처하게 될 때 인촌은 3·1정신을 생각해서라도 경성방직은 문을 닫을 수 없다고 주위 사람들을 격려하게 된다. 중앙학교는 3·1운동 후에도 계속해서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되는데 예컨대 3월 5일에 서울역전 광장에서 전개된 제2차 학생운동에도 전교생이 참가하였고 1926년의 6·10 만세운동에서도 중앙학교 5학년 학생들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서울 종로구 청계천로1 동아미디어센터 인촌기념회
httpwww.inchonmemorial.co.krhtmlinchonm_inchon_think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