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기통신금융사기는 이제 단순한 기망을 넘어 해외 거점의 기업형 조직으로 변모했다. 이에 따라 사법부의 잣대도 서슬 퍼렇게 날이 서 있다. 과거에는 말단 가담자에게 어느 정도 관용을 베풀기도 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재판부는 이제 '몰랐다'는 피고인의 항변보다 '왜 의심하지 않았는가'라는 정황에 더 큰 무게를 둔다. 특히 고수익 알바라는 달콤한 제안에 이끌려 동남아 등지로 출국한 경우, 항공권과 체류비 지원 자체가 이미 불법성을 인지할 수 있었던 명백한 신호로 간주된다. 단순히 시키는 일만 했다는 변명이 더 이상 실형의 면죄부가 되지 못하는 이유다.
법리가 이토록 냉혹해진 결정적인 이유는 '미필적 고의'의 범위를 매우 넓게 잡기 때문이다. 전기통신금융사기 사건에서 판례가 일관되게 강조하는 핵심은, 본인이 이 일이 범죄임을 확신하지 못했더라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의구심을 품은 채 행위를 지속했다면 처벌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이다. 해외 연루 사건에서 피고인들은 흔히 감금이나 강요를 주장하지만, 수사 기관은 입국 초기 동선이나 메신저 대화 기록을 통해 자발성 여부를 현미경처럼 들여다본다. 찰나의 호기심이나 방관이 순식간에 범죄 수행의 자발적 의지로 해석될 수 있다.
더욱 치명적인 것은 해외 거점 조직 가담자에게 적용되는 '범죄단체가입 및 활동죄'다. 이는 단순히 사기죄의 형량을 합산하는 수준을 넘어선다. 조직의 일원으로 이름만 올려도 형량이 기하급수적으로 상향되며, 자신이 직접 돈을 만지지 않았더라도 조직 전체의 편취 금액에 대해 연대 책임을 질 가능성이 열려 있다. 검찰은 현재 해외 거점 범죄를 국가 간 사법 공조를 방해하는 엄벌 사안으로 분류해 구속 수사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결국 "나는 전달만 했을 뿐"이라는 방어 기제는 오히려 자신이 조직의 위계 속에 있었음을 자백하는 최악의 수가 될 수 있다.
또한 범죄 수익의 규모와 상관없이 해외 거점 사건은 양형 기준상 가중 요소가 대거 포함된다. 범죄 수익을 해외로 유출하여 피해 회복을 어렵게 만들었거나, 점조직 형태의 은폐를 도와 수사력을 낭비하게 만든 점 등은 사법부가 꼽는 대표적인 엄벌 사유다. 최근에는 수사 단계에서 확보된 포렌식 데이터가 피고인의 발목을 잡는 경우가 허다하다. 범행 가담 전후에 '보이스피싱 처벌', '해외 알바 단속' 등을 검색한 기록이 단 하나라도 발견된다면, 이는 불법성을 인지하고도 가담했다는 강력한 증거가 되어 모든 변명을 무력화시킨다.
이처럼 법리적 벼랑 끝에 선 상황일수록 초기 대응의 중요성이 커진다. 수사관의 날카로운 질문에 논리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사실과 다른 변명을 늘어놓는 것은 스스로 방어권을 포기하는 행위와 같다.
해외에서 전기통신금융사기에 연루되어 귀국 직후 체포되는 위기 상황에서 무조건적인 부인은 독이 된다. 그보다는 자신이 인지했던 사실의 범위를 명확히 획정하고 범죄 조직이 어떤 교묘한 수법으로 자신을 기망했는지 객관적인 데이터로 증명해야 한다. 검찰은 피의자의 진술 속 모순을 찾아내는 데 능숙하기에 그들의 질문 의도를 미리 읽고 전략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필수이다.
실무상 가장 중요한 승부처는 단순히 사실관계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인지했던 사실과 실제 조직의 범죄 행위 사이의 '인과관계'를 법리적으로 끊어내는 것이다. 본인에게 수익이 귀속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정교한 자금 흐름 분석부터 가입 당시의 기망 상황을 뒷받침할 객관적 포렌식 데이터까지, 검찰의 공격 논리를 선제적으로 무력화할 수 있는 방어막을 구축해야 한다. 무죄나 집행유예라는 결과는 단순한 호소가 아니라, 검찰의 시각에서 봐도 허점이 없는 치밀한 논리 설계 끝에 나오는 산물임을 명심해야 한다.
/로엘 법무법인 황근주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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