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1945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사건과 한국인

이현정 기자 / 기사승인 : 2023-12-07 23: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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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캡처)

 

[매일안전신문=이현정 기자]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사건이 재조명된다.

  

7일 밤 10시 20분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1945년 일본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사건과 그 후의 이야기가 그려졌다.


이날 방송에서 '히로시마 카운트다운' 편으로 그려진 가운데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 실전 투하의 위력과 후폭풍, 그리고 역사의 선택 아래 그 흔적을 평생 새긴 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해졌다.

 

부산에서 태어난 일란성쌍둥이 김형률 형제가 있었다. 쌍둥이 동생은 생후 2년이 채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나고 형률이만 남게 됐다. 하지만 그 역시 한 번 시작되면 멈추지 않는 기침과 수도 없이 재발되는 폐렴증상이 갈수록 심해졌지만 정확한 병명조차 알 수가 없었다. 같은 증세로 막내아들을 떠나보낸 부모의 마음은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형률이 25살이 되었던 1995년 정확한 병명을 알게 된 가족들은 쌍둥이의 질병이 유전 질환이 아닌가 의심하게 됐다. 바로 원자폭탄 때문이었다.

 

1945년 당시 여섯 살이던 형률의 엄마 곡지는 일본 히로시마에서 살았다. 먹고살기 위해 경남 합천에서 히로시마로 건너간 곡지네 가족은 힘겨운 생활을 이어갔다. 그런 곡지 가족들에게 운명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로 다시 화제가 된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 '리틀 보이'를 실은 폭격기가 히로시마로 날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히로시마엔 곡지네 가족 말고도 무려 8만 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던 한국인들의 머리 위로 인류 최악의 무기가 떨어진 것이다.

 

원자폭탄 투하 임무를 맡은 사람은 미군 조종사 폴 티비츠와 클로드 이덜리였다. 히로시마, 나가사키, 고쿠라 등 최종 후보지 세 곳 중 두 사람의 결정에 따라 '리틀 보이'의 투하지가 결정됐다. 1시간 먼저 히로시마에 도착한 클로드 이덜리 소령은 폴 티비츠 대령에게 무전을 보내 폭격지를 히로시마로 제안했다. 

 

 

 

 

▲(사진,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캡처)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히로시마 상공으로 투하된 '리틀 보이'는 지상 550m에 도달한 후 폭발하도록 설계됐다. 운명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고 폭발 순간 엄청난 섬광과 폭풍, 뜨거운 열기가 히로시마 시내를 덮쳤다. 그리고 한 시간 뒤 히로시마 하늘에서 검은 비가 내렸다. 

 

당시의 1차 사료나 해방 직후의 반응을 보면 전시에 해외의 정보를 접하기 어려운 식민지의 한국인들은 대부분 '뭔가 엄청나게 대단한 폭탄이 일본 본토에 떨어졌다' 정도로 알고 있었다. 일본 현지에서조차 정보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식민지 조선에 상세한 정보가 전달되었을 리가 만무하고, 소수의 지식인을 제외한 대중들은 정확히 무슨 상황인지 모르는 어리둥절한 상황이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하다. 대중이 전말을 알게 된 것은 광복 이후였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군수 도시였기에 강제로 끌려와 노동하다 원폭을 맞은 안타까운 한국인이 상당히 많았다. 또한 원폭 투하 후에 일제에 의해 잔해 제거에 우선적으로 강제동원되어 피폭되는 경우도 많았다. 당시 히로시마 총 인구 약 42만명 중 20만명이 피폭, 9~16만명이 수개월 내에 사망했다. 히로시마 인구 중 약 14만명(3분의 1정도)은 조선인이었으며 피폭자는 5만, 그중 약 3만명이 사망, 생존2만명 중 1만 5천은 광복 후 귀국, 5천명은 일본에 잔류하였다고 한다. 현재 피폭자 후손 등을 모두 합친 히로시마 피폭자 총 집계 74만여명 중 10만명 정도가 한국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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